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150년 미국교회 한인 여목사 담임…버지니아주 펄스 장로교회

  150년 역사의 한 미국 장로교회가 처음으로 한인 여성을 임시 담임 목회자로 세웠다.   펄스처치뉴스프레스는 버지니아주 펄스처치 장로교회가 황예나 목사를 담임목사로 선임했다고 9일 보도했다. 교회 측은 “1873년 설립 이래 여성 유색 인종 목회자가 담임이 된 건 최초”라고 밝혔다.   황 목사는 “예전에는 한국계 미국인 여성 사역자는 커녕 여성 목회자를 본 적이 없다”며 “교회 내에서 여성 목사도 목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이를 위해 소명을 받아 사역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 태생인 황 목사는 11살 때 가족과 함께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지역으로 이민 왔다. 메릴랜드주 한인 이민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 청소년 담당 사역 등을 하며 목회자의 꿈을 키웠다.   황 목사는 “교인들이 자신이 가진 강점, 자산, 은사 등을 알 수 있게 돕고 싶다”며 “그들이 이 세상 가운데 각자 ‘교회’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나는 목회자로서 더는 바랄 게 없다”고 전했다.   황 목사는 메릴랜드대학교(영문학), 프린스턴신학대학원(목회학 석사), 루이빌신학대학원(결혼·가정치료학 석사) 등을 졸업했다. 지난 2007년 위튼커뮤니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4년간 부목사로 사역했다. 텍사스주 한인교회인 빛내리교회 등에서 영어권 담당 사역자로도 활동한 경험이 있다. 버지니아주 페어펙스장로교회에서도 부목사로 사역했다.   황 목사는 지난 2011년 미국장로교(PCUSA) 사상 최초의 한인 여성 노회장으로도 선임된 바 있다. 이번에 황 목사를 담임으로 세운 펄스장로교회 역시 PCUSA 소속이다.   황 목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현하고 타인을 섬기며 소외 계층을 위해 힘쓰는 교회가 됐으면 한다”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건강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쓰겠다”고 말했다.   한편, 황예나 목사는 현재 버지니아주 맥린 지역 '와싱톤한인교회'에 출석중인 황휘섭, 이명자씨 부부의 딸이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사설 목사 담임 목사 교회 페이스 흰색 스툴

2023-06-09

[중앙칼럼] 고 박희민 목사가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

2022년 3월 14일이었다. 전립선암으로 투병 중이던 박희민 목사를 만났다.    그는 한인사회의  대표적 1세대 종교인이다. 나성영락교회 2대 담임 목사로 은퇴 후에도 한인 교계의 영적 버팀목 역할을 했다.     당시 본지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시리즈 기사를 위해 박 목사와 인터뷰를 진행했었다.    박 목사는 그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죽음 앞에 서 보니까…”라며 말문을 열었다. 아내와 아침 산책 중에 자주 흥얼거리는 곡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찬양(찬송가 508장) 한 곡조를 불렀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가사는 곧 그의 심경이었다. 가야 할 곳이 그리 멀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을 터다.   박 목사가 암 판정을 받은 건 2018년 8월이었다. 암세포가 뼈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그때 심정을 물었다.    “그동안 목사로서 얼마나 많은 장례식을 집례했겠나. 죽음을 늘 가까이서 보며 살았다. 가족은 충격을 많이 받았는데 나는 오히려 덤덤해지더라.”   병명을 알기 전에는 원인 모를 아픔에 시달려야 했다. 이유도 모른 채 육체적 고통을 감내한 게 1년 정도다. 암 진단은 고통의 원인을 비로소 알게 한 희소식이었다. 병명을 통해 이유를 알았으니 “그랬구나…”라며 되레 이해됐다.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늘을 향해 조용히 감사 기도를 읊조렸다고 했다.   암으로 인한 고통을 말하면서도 박 목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막상 직면해보니까 죽는다는 게 다 나쁜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말투는 초연했다. 죽음에 대해 더 물었다.    “사실 그동안 살면서 비본질적인 것도 욕심내고 그랬다. 그런데 그런 거 다 던져버리게 되더라. 그동안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부족했던 것도 회개하게 되고…요즘은 남은 생을 어떻게 살까, 어떻게 하면 더 뜻깊게 하루를 보낼까, 이런 생각 하며 지낸다.”   죽음과의 조우는 그를 사색으로 안내했다. 본질적인 것에 오롯이 집중하도록 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 영원한 가치를 더 갈망하고 좇게 됐다.    그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본래 죽음은 삶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따라온다. 출생과 함께 죽음이 공존한다. 사실 우리는 한평생 살다 죽는 게 아니다. 하루에도 그 경계를 왔다 갔다 한다. 우리가 삶에 대해 이해하려면 죽음이란 것도 이해해야 하지 않겠나.”     인터뷰 도중 알게 됐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6월 18일이었다. 그는 또 한번 죽음의 그림자를 경험했다. 병원을 다녀오던 중 210번 프리웨이에서 대형 트럭이 박 목사가 운전하던 차를 덮친 것이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생과 사가 종이 한장 차이에 불과함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박 목사는 “죽음이란 렌즈를 통해 찬찬히 인생을 조명하다 보면 신실하게, 정직하게, 사랑하고, 용서하며, 베풀고, 섬기며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떠난 지 53년이나 됐다”고 회상했다.  박 목사는 새벽기도를 나서며 찬양을 흥얼거리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유난히 귓가에 맴돈다고 했다. 이제는 그 찬양을 아내와 같이 부르며 아침을 맞는다고도 했다.    “죽는다는 게 사실 쉬운 건 아니다. 목사지만 고통이 찾아오면 흔들릴 때가 왜 없겠나. 그럴수록 찬송하고 성경을 묵상한다. 그러면 평안함이 찾아오고 기도가 깊어짐을 느낀다.”   박 목사는 간간이 찬양을 부르며 인터뷰를 대신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때마다 질문을 멈추고 그가 부르는 찬양을 조용히 들었다. 박 목사는 죽음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영원한 하늘을 바라고 있었다. 박희민 목사는 그렇게 남은 시간을 보내다 본향으로 돌아갔다. 지난 26일 오전 3시였다.     당시 인터뷰 기사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박 목사의 건강 악화로 추가 인터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의 남겨진 이야기를 이렇게라도 전한다. 장열 / 사회부 부장중앙칼럼 박희민 이야기 박희민 목사 담임 목사 그동안 목사

2023-05-01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